중국을 대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우리도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요즘 화제인 중국 전기차 BYD 매장에 다녀왔다. 새 차를 둘러보고 시승하면서 솔직히 흠잡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가격도 다른 브랜드 동급 차종보다 1000만원 이상 저렴했다. 사실 놀랄 일은 아니다. 중국은 그간 세계 최대의 전기차 시장인 자국 내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실력을 다져왔다. 일례로 2024년 글로벌 전기차 브랜드의 판매 대수 셰어를 보면 상위 10위 안에 중국 브랜드가 3개고, 그중 압도적 1위가 BYD다. 게다가 1위인 BYD 판매 대수는 2위인 테슬라의 2배가량이다. 쪽수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냐는 것도 과거의 얘기다. 매출 금액 기준으로도 2024년 3분기부터는 테슬라를 앞질렀다. 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중국 기업이 처음으로 첨단산업에서 세계 최고 기업을 제쳤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이후 매출로 테슬라가 다시 선두에 오르기는 했지만, 크게 보아 테슬라와 BYD를 전기차 글로벌 톱 2로 부르는 건 잘못이 아니다. 워런 버핏이 2009년부터 BYD에 투자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를 보면 반응이 차갑다. “아무리 좋아도 ‘메이드 인 차이나’는 못 사겠다”는 극단적 거부론부터 “중국산은 로봇청소기·공기청정기는 가능, 텔레비전도 양보할 수 있지만, 몇천만 원짜리 전기차는 메리트가 없다”는 선택적 수용론까지 다양하다. 이런 반응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은 ‘중국 싫어’임에도 길게 형성된 스펙트럼에서 한국인들의 복잡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온라인에서 중국 제품을 칭찬하는 건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알바’ 소리는 기본이고, ‘매국노’나 ‘중국 간첩’ 같은 말까지 듣기 일쑤다. 어떤 커뮤니티에서는 ‘시진핑 비판’을 일종의 신원 확인 테스트처럼 쓰기도 한다. ‘시진핑 개XX’를 해보라고 강요하는 식이다. 기독교를 금지시켰던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신자로 의심되는 이들의 발 앞에 예수의 그림을 놓고 그걸 밟고 지나갈 수 있는지 시험하곤 했다. 이른바 ‘후미에’(그림 밟기)라는 악습이다. 한국의 ‘현대판 후미에’는 시진핑에게 욕을 할 수 있는지다. 안 하면 중국 간첩으로 찍히고, 하면 내 입이 더러워진다. 내가 아무리 떳떳하다 한들 어느 쪽을 택해도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중국에 대한 거부감이 이 정도로 강한 나라도 찾기 힘들다. 2022년 글로벌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의 81%가 중국에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2위인 스위스(72%), 3위인 일본(69%)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 사람들이 주변국 중에 가장 싫어하는 나라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영원한 숙적’ 일본이 부동의 1위일 것 같았지만 2021년 이후 중국이 앞섰다. 요약하면, 2020년대의 한국인들은 대체로 중국을 싫어한다.
우리는 왜 중국이 싫을까? 만약 한국도 중국도 아닌 제3국의 친구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면 좋을까? 사드 때문일까? 코로나 때문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중국이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이다. 중국은 1980년대 이후 거대한 시장과 저가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경제의 엔진을 세차게 돌렸다. 1990년 중국 경제 규모는 미국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지만, 2023년에는 3분의 2 수준까지 성장했다.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이미 15년 전인 2010년이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시작해 세계의 시장이 됐고, 이제는 세계의 경쟁자가 되었다. 한국은 중국의 성장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본 나라다.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중국에 공장을 짓고 시장을 개척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금도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다. 2010년 이후 한국의 전체 교역량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위 미국보다 두 배 정도 크다.
하지만 이젠 중국이 너무 커버렸다. 반도체, 배터리, 조선, 자동차, 디스플레이까지, 중국은 우리 주력 산업 전반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됐다. 가격 경쟁력은 이미 앞섰고, 기술력 격차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직 우리가 조금 우위에 있는 분야도 있지만, 마음 놓을 상황이 아니다. 거기에 더해 우리를 마주하는 현대의 중국은, 배려를 찾기 힘든 자국 중심적인 태도를 일관했다. 걸핏하면 경제 보복을 했고, 문화·역사 문제에서 한국을 배제하려 들었다. 경제적으로 의존하면서도 불편한 감정이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중국은 몇천 년 역사 속에 얽혀 있었다. 하지만 두 나라가 친구처럼 지낸 기억은 별로 없다. 중국은 늘 형님처럼, 부모처럼 조선과 한국을 대하려 했고, 때론 강압적으로 나왔다. 한국인들이 중국을 불편하게 여기는 이유는 단순한 반감이 아니다. 2017년 트럼프가 시진핑을 만난 뒤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하더라”라고 말했을 때 한국인들의 기분은 어땠나? 중국이 싫다는 한국인들에게는 대국의 부상과 우리의 종속을 경계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본능적 거부감이 깔려 있다. 왜 싫냐고? “너무 커졌고, 너무 가까이 있고, 우리를 너무 신경 쓰이게 하니까.”
이제 더 중요한 건 앞으로다. 바로 옆에 있는 중국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 물리적 단절은 불가능하다. 한국만 뚝 떼어다 다른 대륙으로 이사를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단절하면 될까? 중국산 제품을 안 쓰면 해결될까? 한때 그런 실험이 있었다. 중국에서 만든 물건을 하나도 쓰지 않고 살아보자는 ‘차이나프리’ 콘텐츠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2007년 미국의 한 작가가 <메이드 인 차이나 없는 1년>을 출간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아이에게 10달러짜리 중국산 신발 대신 68달러짜리 이탈리아산 신발을 신겼고, 남편 생일 케이크에 꽂을 초를 사러 갔다가 가게 6곳에서 파는 게 모두 중국산이어서 포기했다.
당시 한국에서도 한 방송사가 비슷한 실험을 했다. 한국, 미국, 일본 가정에서 중국산 제품을 전부 배제해봤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비 오는 날엔 우산이 없었고, 중국산 전구를 빼버린 저녁엔 불도 켤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장난감이 사라진 방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신발이 없어 양말 바람으로 밖에 나가야 했고, 에어컨 없이 무더운 여름날을 버티다 열사병에 걸리는 일도 생겼다. 결국 ‘차이나프리’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다. 지금은 상황이 더 심화됐다. 2024년 현재, 중국의 수출 규모는 2007년의 3배에 달한다. 이제 중국산 제품 없이 사는 건 한층 어려워졌다. 경제적 단절은 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과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 한 가지 힌트는 지난 설 연휴 때 등장한 중국산 생성형 AI 딥시크(DeepSeek)에서 찾을 수 있다. 딥시크가 나오기 전까지 AI 시장은 미국의 독무대처럼 보였다. 중국은 미국의 금수 조치로 반도체도 제대로 사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독주하는 게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딥시크가 비용을 상대적으로 덜 들이면서도 챗GPT에 버금가는 서비스를 실현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게다가 오픈소스로 과감하게 개방에 나서면서 후발 주자의 성공 모델로 각광받았다. 딥시크는 중국이 새로운 길을 열고, 우리에게도 기회를 보여준 사례였다. 딥시크가 남긴 가장 큰 교훈은 이것이다. 꼭 1등이 아니어도, 영리하게 따라가면 기회는 있으며, 우리는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는 것.
사실 우리는 이미 중국과 공존하고 있다. 하이얼 와인냉장고나 샤오미 로봇청소기처럼 품질 좋은 중국 제품들은 이미 우리 생활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알리익스프레스와 테무는 한국 이커머스 시장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될 거란 우려가 컸지만, 결과적으로 저가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수준에 그쳤다. 우리의 생각보다 개별 소비자들은 가격과 품질을 꼼꼼하게 비교하면서 선택한다. 이 소비자들이 마치 하나의 세포처럼 작용하는 시장은 당신이 걱정하는 것만큼 우습지 않다. 시장은 늘 우리의 예상을 넘어설 만큼 유기적이다. BYD가 위협적이라고? 혹은 BYD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결과 역시 시장의 유기성에 맡기면 될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위협일까, 기회일까? 당연한 얘기지만, 둘 다 맞다. ‘중국산은 무조건 나쁘다’거나 ‘중국은 무조건 경계해야 한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위협이 되는 산업에서는 기술 격차를 벌리고, 협력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과감히 손을 잡으면 될 일이다. 앞으로의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복잡한 중국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무조건적인 거부나 환영이 아닌, 실용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한 이유다. 중국산 전기차든, 중국산 AI든, 결국 중요한 건 제품의 실체적 가치다. 중요한 건 감정이 아니라 이성, 편견이 아니라 냉정한 판단이다. 중국을 혐오하던 시대는 지나야 한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중국을 대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