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중국공산당은 창당 100년을 맞는다. 집권만 72주년이다. 그 긴 세월을 버티게 한 정당성은 무엇인가?
중국공산당 100년의 정당성
“중국이 법치국가라고요? 무슨 엉터리 같은 말입니까. 일당독재 아래에선 자기들 맘대로 해치우고 마는데…, 누구도 공산당에 뭐라 못 하잖아요.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일당독재!” 몇 해 전 중국에 있을 때의 일이다. 일당독재! 거의 울먹이던 40대 중반의 중국인 남성 Y의 일갈이 뇌리에 꽂혔다. 중국인들도 ‘공산당 일당 체제’에 불만이 없을 리 만무하다. 비슷한 시기에 개인적으로 만났던 중국인 지식인 K도 밥을 먹다 말고 돌연 목소리를 낮췄다. “세상에 독재를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소.” 당원 수 9000만 명이 넘는 세계 최대의 정당 중국공산당은 2021년 창당 100주년을 맞이한다. 중국엔 올 한 해 축하의 물결이 가득할 터이다. 공산당은 그동안 목표로 내건 빈곤 퇴치의 성과를 전 세계에 대고 자랑할 것이다. 코로나19도 우수하게 대처했으며, 경기 후퇴도 성공적으로 막고 있다고 강조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중국공산당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첫 장면은 Y와 K의 말이다. Y를 만났던 길거리, 주민들이 모두 떠나고 철거를 앞둔 건물만 남은 스산한 그 골목에 가득했던 엄동의 공기가 생생하다. 왁자지껄한 술집에서 주위를 경계하던 K의 조심스러운 태도 또한 잊히지 않는다.
꼭 3년 전 일이다. 2017년 11월 베이징 외곽의 다싱구 신젠촌이란 지역에서 일어난 화재로 19명(어린이 8명 포함)이 숨졌다. 이곳은 농민공, 곧 중국 내 다른 지역에서 돈을 벌기 위해 큰 도시로 온 이주 노동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굳이 비유한다면 질서 없이 날림으로 지은 집들이 늘어선 판자촌이다. 정부의 대응은 보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화재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은 형식일 뿐이었다. 도리어 ‘안전에 대한 우려를 제거한다’면서 주민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다. 2~3일 안에 집을 비우라며 서둘러 물과 전기를 끊더니, 한밤중에 중장비들이 들이닥쳐 마을 어귀부터 철거에 돌입했다. 주민들은 세간을 대충 싸고 옷도 급한 대로 껴입은 채 길바닥으로 나앉았다. 돈 벌러 상경한 이들이 추운 겨울에 갑자기 갈 곳이 있을 리 없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만 Y는 그곳이 원래 주민등록지여서 철거 신세를 면했다. 대신 졸지에 이웃을 모두 잃었다.
베이징시가 당시 강조한 공식 입장은 “수도 이외의 기능은 분산시킨다”는 정책이었다. 앞서 같은 해 4월 시진핑 주석이 발표한 신도시 개발 계획의 취지였다. 중국에서 최고지도자가 거론하면 공산당 내 논의가 이미 마무리된 문제란 의미다. 토를 달아봤자 소용없을 것이었다. 당시 철거 정국을 주도한 베이징시의 1인자 차이치(蔡奇) 서기는 이 무렵 “기층 민중을 다룰 땐 진짜 총칼을 들고 피를 묻혀가며 강대강으로 과감하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다. 결국 그는 자신의 말을 실천한 것이었다. 차이치는 지금도 건재하고, 여전히 시진핑이 총애하는 측근으로 평가된다.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는 엄연한 현실이다. 공산당의 결정은 절대적이고 누구도 그것을 견제할 수 없다. 야당도 없고, 정부로부터 독립된 언론도, 시민단체도 없다. 견제받지 않는 독재 권력은 폭주한다. 근래에 중국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국제 뉴스들, 이를테면 신장(新疆) 지역에서 위구르족에 가해지는 탄압, ‘중국이 되기 싫다’며 폭발한 홍콩의 불만 등은 모두 일당독재와 무관하지 않다. 화웨이와 틱톡(TikTok)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공격도 마찬가지여서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받는 중국 기업들이 미국인의 정보를 수집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는 의심이 깔려 있다. ‘독재’ 중국공산당은 서구권으로부터 비판받고, 중국 내에도 불만이 존재한다. 외부에서 중국공산당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은 여기서 시작한다. 그들은 싫어하겠지만 ‘조반유리(造反有理)’, 반발에는 이유가 있다.
단,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의 주류다. 주류는 현실을 비판하더라도, 공산당 집권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는다. 세계 모든 정당과 마찬가지로 중국공산당도 집권이 목표다. 중국공산당이 이미 잡은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분산하며 무너지는 일은 기대할 수 없다. 집권 주류를 알아야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2021년 10월이 되면 집권 72주년을 맞이한다. 인류 역사상 정당으로서 최장기 집권 기록을 가진 소련공산당의 ‘일당 통치’ 기간은 69년(소련 수립 기준) 또는 74년(볼셰비키 혁명 기준)이다. 중국 일각에서는 이미 소련을 추월했다며 축배를 드는 분위기다. 중국 역사는 항상 집권 세력에 불만을 품은 집단의 혁명과 내란을 통해 권력 교체가 이뤄졌지만, 중국공산당에 대한 의미 있는 도전은 아직 없다. 오히려 중국공산당은 업적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인민들에게 ‘집권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두 가지는 ‘인민해방’과 ‘개혁개방’으로 정리된다.
‘인민해방’은 중국공산당이 백성을 보살피지 않는 무능한 황실, 약탈과 식민지화로 중국을 유린한 제국 열강, 전국 각지에 난립하며 권력을 탐했던 군벌들의 시대를 모두 끝내고, 중국 인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었다는 의미다. 1800년대 중반부터 100여 년은 중국과 중국인들에게 실로 잔인한 시대였다. 아편전쟁은 영국이 중국인들에게 마약을 판매한 뒤 이를 단속하려는 중국을 상대로 일으킨,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부도덕한 전쟁이었다. 당시 프랑스·영국 연합군은 베이징의 황실 정원에 쳐들어가 소장품을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부패하고 무능한 만년의 청나라 황실과 조정은 이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동아시아 주도권은 일본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일본도 서구 열강과 다르지 않은 불평등조약을 중국에 강요했다. 청나라가 망한 뒤 중국은 여러 군벌 세력에 의해 여러 조각으로 쪼개졌고, 일본은 그 틈을 타 직접 본토를 침공했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살상이었던 난징대학살과 생화학무기 개발을 위한 생체실험이 자행된 731부대 등 중국인에게 가한 일본의 폭력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일본이 청나라 마지막 황제를 데려다 중국 땅에 괴뢰국을 만들어 사실상 식민 통치를 한 것은 중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됐다. 아편전쟁이 발발한 1840년대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1949년까지 민생이 도탄에 빠졌던 시기를 중국공산당은 ‘백 년의 치욕’이라고 한다. 이를 마무리 짓기까지 과정이 온전히 중국공산당만의 공로는 아니지만, 그들이 최후의 승자라는 것은 틀림없다. 지금도 중국공산당이 유독 항일투쟁의 업적을 강조하고, 그들 휘하의 방송사가 항일 드라마를 줄기차게 만드는 이유는 그것이 집권 정당성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권 이후 중국공산당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1950년대 말 생산력을 증대시킨다며 추진한 대약진운동이 실패하면서 3000만~5000만 명이 굶어 죽는 대기근의 참상이 빚어졌다. 극한의 정치 투쟁과 문화 파괴 행위로 내전 양상까지 띠었던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50만~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비록 ‘해방’은 했을지언정 빈곤과 광기에 지쳐가던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은 새로운 집권 정당성의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1980년대부터 본격 진행된 개혁개방이다.
1978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중국공산당은 이전까지의 문화대혁명을 정리하고 경제체제를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한다는 획기적인 결정을 내린다. 사유재산을 허용하고 이를 통해 자산을 축적한 자본가들도 공산당에 입당시켰다. 실제로 알리바바 창업자인 마윈 전 회장과 한때 중국 최고의 부호였던 왕젠린 완다그룹 회장 등 중국의 유수 민간 기업 총수의 다수가 당원이다.
자본가가 공산당에 입당한다? 자본가를 상대로 계급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했던 마르크스가 들으면 분통을 터뜨릴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유연하게(또는 제멋대로) 시대를 창조해냈다. 심지어 지금은 마르크스의 제사를 직접 지내며 ‘정통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다. 2018년 5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 최대 행사가 열린 곳은 그의 고향 독일 트리어도, 망명지 영국 런던도, 그의 사상을 최초로 실현했던 러시아 모스크바도 아니었다. 중국 베이징이었다. 중국공산당의 최고지도자 시진핑의 기념사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을 깊숙이 바꿔놨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와 중국 개혁개방의 구체적인 현실을 결합해 ‘중국특색사회주의’의 위대한 실천을 이끌었다.”
마르크스주의와 개혁개방의 ‘결합’ 성과는 눈이 부시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 말 7억7000만 명에 이르던 중국 농촌의 절대빈곤층은 40여 년 만인 2020년 모두 빈곤에서 벗어났다. 가난에 찌들었던 인민들이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게 됐다. 길을 닦고, 집을 지었으며, 도시를 만들었다. 중국의 1인당 GDP는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 156달러였는데, 이제 1만 달러가 넘는다. 중국 국내만이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중국이 계속 성장 엔진을 돌린 덕에 더 큰 피해를 막았다. 그 무렵 유행했던 말이다. “1949년엔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고, 1979년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고, 1989년엔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었으며, 2009년엔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었다.” 각각 중국 건국, 개혁개방 시작, 동구 공산권 붕괴,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의 연도이다. 그 과정은 혼란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떵떵거리며 잘 살게 된 이들이 집권층을 욕할까? 결국 중국공산당의 두 번째 집권 정당성은 곳간에서 나온다.
역사 속에서 중국은 원래 세계의 중심이자 으뜸가는 나라였다. 아편전쟁 이전인 1820년 청나라의 경제는 세계 GDP의 32.9%, 거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영국의 7배 규모로, 압도적인 세계 1위였다. 그러나 ‘100년의 치욕’을 겪으면서 중국 경제는 세계 GDP의 4.5%(1950년)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건국 70년이 지난 지금은 다시 16% 선까지 회복했다. 중국공산당은 이 또한 성과로 삼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시진핑 주석 들어서 자주 이야기되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은 과거 세계 1위 시절의 자존심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관련 정책을 보면 급속한 경제성장의 폐해로 지적되는 빈부 차이 등 사회문제를 보완하고, 과학기술 및 군사력을 보강해 명실공히 초강대국의 지위에 오르겠다는 목표를 제시한다.